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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사회 에세이 꿀조합 - 개인주의자 선언&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by 피클북덕 2021. 3. 24.

 

사회에세이는 개인, 혹은 집단의 시국선언과도 같다. 시대를 막론하고 이러한 에세이들은 꾸준히 서점가의 한켠을 차지한다.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사회 에세이는 국가의 공정도, 부패도 등 민감한 수치에 대한 사람들의 현재 인식을 반영한다. 정확히 말하면 '현재 우리 국가가 얼마나 살 만 한지'에 대한 또다른 여론 지표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딱딱한 정치, 경제학, 사회학 이론과 결부짓지 않고 개인의 필력에만 의존해 각자 의견을 전개한다는 점에서 마이클 샌델과 같은 학자의 글보다 더욱 가독성도 높다(물론 샌델 교수의 글은 정말 훌륭하지만 재미 측면에서만 보자면 그렇다).

 

이런 관점에서 사회에세이 꿀조합 리스트를 작성해 보았다. 바로 문유석 저의 <개인주의자 선언>(2015), 김영민 저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2018)이다.

 

개인주의자 선언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먼저 저자 소개를 하자면, 두 사람 모두 한국 사회 내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다. 문유석씨는 판사이고, 김영민씨는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이다. 그런데 그들의 글은 권위의식과는 꽤 거리가 멀었다. 사회를 바라보는 슬픔 섞인 시각은 물론, 풍자적 유머러스함, 나름 명성 있는 직업을 행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자조(a.k.a. 직업적 현타)가 모두 혼재되어 있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오히려 많은 걸 보고 들을 수 있는 자리일수록 현타가 세기 마련이다. 큰 정보력과 파급력을 가진 조직에 몸담고 있을수록 개인의 도덕적 관념과 집단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일이 더욱 잦을 것은 뻔하다. 그렇기에 각기 다른 그들의 글에서 같은 지향성을 느낄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한국 대학에서는 교수가 아무리 썩은 유머를 던져도, 학생들은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법인데. "산채 비빔밥이 맛있을까요, 죽은 채 비빔밥이 맛있을까요" 따위의 심하게 부패한 개그에도 학생들은 박장대소를 해준다던데. 학생들이 쉽게 웃어주기 때문에 교수들의 농담력이 날로 시들어가는 거야. 이러던 K교수마저도 막상 학생들의 무관심에 맞닥뜨리자 그만 가냘픈 내면이 침범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K교수는 지식인의 전매특허인 고도의 자기합리화를 통해 강의를 수습하기로 했다.
"'교수님은 왜 이렇게 재미없는 농담을 하시는 거야'라고 여러분은 항의할 수 있겠지요, 속으로. 재미없는 농담을 가지고 여러분들을 탄압하는 데 바로 선생님의 뜻이 있는 거야. 교수는 대학 내의 국가야. 여러분들이 그동안 제대로 독서를 해왔다면 이 정도의 농담으로 내면이 침범당하진 않았겠지. 괴롭다고? 아프니까 청춘이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中 K교수의 국가론, (107-108p)
증인신청서를 받아들고 고민했다. 엄마가 아빠를 죽게 한 사건의 증인으로 불러 아빠가 평소 엄마와 자신에게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대답하게 하는 것, 그 자체가 폭력 아닌가. 하지만 검사, 변호인 모두 달리 방법이 없단다. 결국, 이모가 보호하고 있는 아이를 증인으로 부를 수밖에 없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미국의 아동피해자 증언 매뉴얼을 찾아 읽어보았다. 참고는 되었지만, 정답은 없었다. 검사, 변호인에게 솔직히 고민을 토로하고 협조를 구했다. 그래도 불안했다. <개인주의자 선언>中 증인에 대한 예의, (142p)

 

단편적인 글만 가져왔지만 그래도 전술한 직업 수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타와 문제의식 제기를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어느 직업이 안 그러겠냐만, 이쪽은 언론, 정치 등등 각 계와의 연결고리가 너무나도 선명해서 이러한 고민이 더욱 부각되어 보인다.

 

문체를 비교했을 때 <개인주의자 선언>은 차분한 편에 속하지만,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거의 유머로 점철되었다. 그럼에도 글 하나당 호흡이 비슷한 길이인 건 흥미로운 포인트. 

 

사회과학 에세이답게 각각 당시 시국에 대한 평론도 있었다.

결국 취업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자기통제적 자기계발에 매진하는 이십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박탈감과 불안감 속에서 사회적 약자의 고난을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돌리며 자신은 그래도 노력하고 있기에 그들보다는 낫다고 구분짓기를 시도하고 있다. 아무도 이십대들의 고통을 이해해주지 않기 때문에 이들도 그 누구의 고통도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이기도 하다. <개인주의자 선언>中 변한 건 세대가 아니라 시대다, (114p)
정치적 길치가 토론회에서 보여주는 대표적인 증상은 동문서답이다. 모르는 것이 어디 동과 서뿐이랴. 남과 북도 몰라서 '종북'이란 말을 남용하기도 하고, 앞과 뒤도 몰라서 퇴행적인 정책을 진보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좌와 우도 몰라서 '좌파'라는 말을 곡해하기도 한다. 그럴 경우 사회자는 개입해야 한다. "'라이트'와 '레프트'의 뜻을 모르는 권투 선수에게 라이트훅과 레프트훅을 주문하는 국민의 기분이 어떻겠어요?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中 대선 후보와 토론하는 법, (172p)

재미있는 게,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그 해 한양대 논술인가 연세대 인문논술 지문 중 하나로 출제되었다. 한창 논술을 준비하던 때 기출로 풀었었는데 글 자체가 워낙 흡입력이 좋아서 지문 이입과 작문에도 수월했었다. 글 하나가 거의 다 실렸던 걸로 기억한다. 

 

바로 58p의, '추석이란 무엇인가'이다. 저작권 문제에 연루될 수도 있으니 끝부분만 조금 첨부한다.

추석을 맞아 모여든 친척들은 늘 그러했던 것처럼 당신의 근황에 과도한 관심을 가질 것이다. 취직은 했는지, 결혼 계획은 있는지, 아이는 언제 낳을 것인지, 살은 언제 뺄 것인지 등등. 그러나 21세기의 냉정한 과학자가 느끼한 연애편지를 쓰던 20세기의 청년이 아니듯이, 당신도 과거의 당신이 아니며, 친척도 과거의 친척이 아니며, 가족도 옛날의 가족이 아니며, 추석도 과거의 추석이 아니다. 따라서 '그런 질문은 집어치워주시죠'라는 시선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친척이 명절을 핑계로 집요하게 당신의 인생에 대해 캐물어 온다면, 그들이 평소에 직면하지 않았을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게 좋다. 당숙이 "너 언제 취직할 거니?"라고 물으면, "곧 하겠죠, 뭐"라고 얼버무리지 말고 "당숙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추석 때라서 일부러 물어보는 거란다"라고 하거든, "추석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중략)

이 글은 인터넷에서도 꽤 화제가 됐었다. 나 역시 '철학의 진정한 적성을 이렇게 발견하다니'와 같은 놀라움이 일었다. 역시 인문학은 삶의 무기로써 가장 적합한 학문이다. 끝말잇기를 할 때 자연과학이 차지하는 괴랄한 우위만 빼면 말이다. 이리듐

  

<개인주의자 선언>의 문유석 판사의 경우, 이 책은 물론 <미스 함무라비>라는 유명 드라마의 시나리오 원저자이기도 하다. 그 드라마를 보진 않았지만 명대사로 꼽히는 몇몇 멘트들을 보고 감명받았던 기억이 난다.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으며 느꼈던 따뜻함 그대로였다. 다른 저서인 <판사유감>도 베스트셀러였는데 한 번 읽어보고 싶다.

 

혹시나 아직 두 권을 모두 읽어보지 않아 도전해보고 싶다 하는 독자는, 시대순으로(개인주의자 선언-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읽어보길 추천한다. 뭐 마음대로 읽어도 딱히 상관은 없지만, 당시 시대상(세월호 사고 직후의 혼란과 우울함이 가득했던 2015년, 탄핵과 새 정권의 교체를 경험한 후의 2018년)을 흐름에 맞게 훑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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