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걷는 길

외국에서 바라본 한국(부제 : 귀국 후 또 힘겨워할 나를 위해 쓰는 노파심의 글)

피클북덕 2023. 6. 23. 03:24

올 땐 마냥 기대에 부풀어서 왔지만, 막상 와서 보니 이런저런 애로사항이 많았던 말레이시아 생활이 끝나간다. 
물론 한국보다 선진국은 아니니 어느 정도의 불편함은 각오했었지만 그 각오를 뛰어넘는 일들도 많았고... 비상식적인 해프닝들의 연속이기도 했지만..어쨌든 절대 후회하지는 않는다. 일단 교환학생 안 오고 한국에서 주구장창 학교생활만 했다면 아마 미쳐버렸을 것이다(진심).
 
외국에서의 생활은 한 번도 한 달 넘게 떠본 적이 없었던 모국, 한국에 대해 객관적인 시선을 갖게 했다. 살아본 국가가 여기 하나 뿐이어서 아직 비교군이 다양하지 못하지만, 나름 객관적인 환경에서 한국에 대해 해왔던 고찰들을 정리 해보고자 한다. 이건 앞으로 귀국 후 이런저런 사유 때문에 극악의 스트레스에 시달릴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 혹독한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고, 미리 쓰는 개방형 타임캡슐 같은 거다.
 

1. 훌륭한 서비스 퀄리티 

- 이 이유는 일단 향상된 경제 수준과 한국인 특유의 까다로움에서 나온다. 말레이시아에 비해 높은 경제 수준인 만큼 더 세심하고 소비자 친화적인 서비스를 제공받길 원하는 건 당연한 거다. 특히 더 많은 돈을 낼수록. 이건 뭐 말할 것도 없을 거다. 다만 한국과 비슷한 돈을 지불하는 경우가 이곳에서 있었을 때에도, 이 정의는 변하지 않았다. 특히 라마단 마지막 날, 저녁을 먹으러 KFC에 갔을 때 고장난 번호 호출기와 느려터진 직원들(느린 속도는 물론, 음식이 나와도 부르지 않았음. 1시간 기다렸다), 그 와중에 음식 위를 배회하던 바선생까지 완벽 콜라보를 이루었던 날....한국이 너무 그리웠다.
한편으론, 한국인 특유의 깐깐함 때문에 더 퀄리티가 높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본적으로 '손님이 왕'이라는 전제를 까는 것부터가 서비스업 종사자에 대한 대우 차이를 만든다. 그리고 정(情)문화까지 얽혀, 소비자 입장에서 당연시 되는 기본 서비스의 기대치가 상당히 높은 듯하다. 일례로 식당에 가면 무료로 제공되는 물과 물수건. 
 
- 그리고 반도인 특성이라고 추정되는데(근데 말레이시아도 peninsular인데...?), 자존심이 엄청 세고 다혈질이다. 무시받는 것이 상당히 히든 버튼이라 고의든 미필적 고의든 눌리면 큰일난다. 이러한 특성이 높은 서비스 질에 기여하지 않았나 싶다. 이의 돌연변이는 갑질과 진상이다.
 
- 말레이시아에서는 주문한 음식이 잘못 나와도 컴플레인 거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 그냥 먹는다. 나도 처음엔 이게 뭐지 싶다가 그냥... 현지인 마인드를 장착하고 살게 되었다. 학교 푸드코트에서 늘 핏물이 고인 치킨이 나와도 그냥 그러려니...하고 발라먹거나 그냥 안 시키고 마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본인 수강 과목의 교수님은 '말레이시아의 서비스 퀄리티는 좋지 않다. 음식이 잘못 나와도 그냥 먹는다. 더 많은 사람들이 좋지 않은 서비스 퀄리티에 대해 항의해야 이것이 바뀔 것이다.'라고 일갈하셨다. 살아보니, 그리고 모국과 비교해보니 전적으로 동의하는 말이었다. 서비스 사용자로서는 편리하나 종사자로서는 빡센 한국.
 

2. 과한 경쟁, 효율을 향한 광기

- 너무 심심한 묘사이다. 누구나 다 아는 문제점이다. 나라가 좁아서, 근데 그에 비해 인구 밀도는 높아서... 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 더 추가하자면, '자본에 대한 열망이 높아서'. 
일단 이 곳은 한국보단 넓은데(동+서 포함하면 당연), 인구 밀도는 3000만대로 한국보다 낮다. 이런저런 이유들이 합쳐져서 그런진 몰라도, 사람들이 상당히 여유롭다. 물론 이 사람들도 돈을 당연히 열망하나, 한국처럼 미쳐있진 않다. 이전에 Quora라는 글로벌 지식in같은 사이트에 '말레이시아-말레이시안들은 왜 이렇게 게으른가?'라는 질문이 올라왔다. 여기에 말-말레이시아 사람들이 분개하며 차이니즈-말레이시안이 계산적인 건 맞지만, 우리가 그렇게 멍청하진 않다. 우리는 일상에서의 행복을 추구한다. 라는 답변을 달았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들의 생활을 보면, 일단 하루에 5번 정도 기도를 하기 위해 일상을 중단한다는 점에서 어떤 최상의 효율을 논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문화 차이니까 비난할 대상은 아니다. 다만 빨리빨리나 효율, 가성비 어쩌구를 강조하는 한국과 확연히 다른 풍경이 펼쳐짐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더하자면, 날씨가 진짜 무지막지하게 더워서 사람 진을 다 빼놓는다. 현지인들도 물통을 엄청 들고다니고 낮잠을 자니 이건 인종에 따라 적응도가 달라지는 문제가 아닌 게 분명하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낮에 일 속도가 더뎌질 수밖에 없는데....그럼 일을 밤에 하냐(ex : 도로 정비)? 그건 또 아니다.
 
- 다시 한국의 상황으로 돌아가자. 이 곳과 다르게 나름 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날씨+급한(반도 특성이라고 하자)국민성+높은 경쟁률+자본을 향한 열망. 그리고 조금 더 추가해서, 사회 풍조에 순응적인 국민들(이 역시 역효과 사례가 존재하는데, 선동에 약하다는 점이다)까지. 단기간에 이례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해낸 요인들이다. 그런데 이 것들은 결국 목적 달성 이후, 병폐의 근원으로 전락하고 있다. 뭐...국가대표급 불행지수인 자살율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모두가 느끼고 있는 부분이다. 사회에 뛰어들기 위해 준비하는 단계인 나조차도 지난 n년간 스펙을 쌓고, 고등학생 때까지 아무도 찾으라 하지 않았던 진로를 황급하게 '건져내느라' 불행했으니. 
경제발전은 효율성에 기인한다. 효율성이란 광범위한 획일화와 유사하다. 다양성을 존중하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광기에 휩싸여 고속질주하는 차에게 표지판이 얼마나 의미있을까. 그렇게 순종적인 국민과 획일화의 콜라보는 너무나도 궁합이 잘 맞았고, 현재 한국의 위치까지 끌어올렸으나, 이 순종적인 사람들도 비(非)초인인지라 지치기 시작했다. 과하게 눈치를 보는 습성 역시 이 대대적인 획일화에서 파생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칼같이 유행따라 맞춰 입는 옷, 남들과 같은 시기를 요구받는 정형적인 인생 프레임(ex : 'N살까진 해야하는 것들', '~~하면 인생 꼬인다'라는 글들을 SNS에서 수도 없이 보지 않는가?). 이 현상이 개인 주관으로까지 확장되어, 남들과 같은 생각을 요구받는다. '~~하는 저, 이상한 건가요?'라는 글의 댓글에서 다양한 의견은 꽤나 찾아보기 힘들고, 건설적인 토론이 이루어지는 걸 보기는 더 힘들다. 남들과 다르면(정말 도덕적으로 상당히 '틀린' 경우 말고는) 캡쳐되고 박제되어 조리돌림당한다. 정리하면, 이 사회에서 한 일원이 되기 위해 요구받는 것들이 정말 많기에, 개인은 불행하다.

 
- 비슷하지만 다른 맥락에서, 심각한 '기준'의 남발과 이에 따른 계층화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경쟁에서 이기고, 더 나은 효율(이 맥락에서는 완벽함)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첨예한 '기준'들이 필요하다. 조금이라도 내가 상대보다 높은 계단에 서 있다는 우월감이 필요하다. 그래서 끊임없이 칼질을 한다. 원래 통일되어 있었던 하나의 기준을 N단위로 세분화한다. 가장 보편적인 주거 형태인 아파트에 거주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공공임대아파트인지, 전세인지 자가인지로 또 나눈다. 외모의 경우, 무례할 정도로 조각조각 나누어 평가한다. 귀 모양, 배꼽 모양조차도 평가 대상이 되는 걸 보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우위에 오르고 싶은 한국인들은 이 기준을 또 수렴하여 각자 측정 도구를 들고 내가 속한 기준은 무엇인지 평가하기 시작한다. 스스로를, 그리고 서로를. 이 경쟁에서 조금이라도 밀려나지 않기 위해 방어 기제로 이기심과 질투심이 발달하였다. 부러움을 인정하지 않고 비꼬며 까내리거나, 혹은 자랑이 아님에도 열등감을 느끼고 특정 포인트에만 집중하며 분노하는 사람들은 이 맥락에 계류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고 느낀다.
 

3. 높은 도덕적 기준

- 도덕적 완전무결성에 대한 선망도가 높다. 연예인에게 더욱 강하게 적용되나, 개개인에게 적용되는지는 의문이다. 필자 역시 주변 환경의 영향을 상당히 받는 청소년기 및 20대 초반까지 SNS 및 기사 댓글을 접하며 이 압박이 굉장히 심하게 작용했는데, 지금은 그러한 채찍질의 방향이 스스로에게 가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를 곱씹어보고 해방감을 느꼈다. 물론 범법은 당연히 지양한다.
 

4. 우상화와 신성화, 권위의식


- 일단 2~3과 연결되는 부분이 많다. 도덕적 기준이 상당히 높게 작용하기에, 촘촘한 그 기준들을 모두 통과한 공인에게는 신성화 라벨이 붙여진다. 일상에서 우리는  -느님과 같은 수식어들을 꽤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대외적으로 비추어지는 이미지 말고도 알음알음 구전되는 사생활까지 검증이 되어야 이러한 칭호를 획득(?)할 수 있는 듯하다. 
일상적인 우상화에는 전문가에 대한 무한 신뢰가 있다. 사회 전체적으로 교수/의사 등등 전문직에 대한 상당한 우상화가 보편화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럼 전문가가 모르면 누가 제일 잘 아냐;라고 반박할 시 딱히 할 말은 없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너무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는 느낌. 소리전문가로 매체에서 활동했던 S대 모 교수 사건도 그렇고... 여러 수다 프로그램에 의사 가운 걸치고 나오는 사람들에게 형성되는 광적인 신뢰의 분위기가 옳은 건가 하는 의문이 한 번씩 든다. 다른 예로는 과할 정도로 '신뢰를 조장'하는 유튜브 썸네일이 있다.
 
- 말레이시아에서 느꼈던 교수님의 포지션은 한국과는 확연히 달랐다.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고, 교수님이 장난스럽게 학생들을 타박하는 경우도 많았고, 종강 후에 다같이 교수님과 사진을 찍기도 했다(!). 메일이 아닌 개인톡도 서슴없이 주고받았다. 나 역시도 한국인 교환학생이라고 잘 챙겨주시고, 종강 후 교수님과 단둘이 사진도 찍었다.

5. 비교적 높은 자국 자본의 비율

- 말레이시아는 외국 자본으로 굴러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유국이라 기름값은 한국보다 싸다는 장점이 있어서인가? 모르겠다. 몰만 가도..아니 그냥 시가지만 가도 중국 자본과 일본 자본이 상당하다. 일례로 쿠알라룸푸르 파빌리온 몰에는 중국 몰인 Parkson이 매 층마다, 심지어 같은 위치에 딱 딱 딱 위치해있다. 내부 에스컬레이터도 따로 있고, 층별로 가구, 옷, 화장품 등등을 판다. 파빌리온 6층엔 Japan Street가 대놓고 있다. 비단 파빌리온 뿐만 아니라 그냥 구역구역 있는 몰만 가도, grocery store만 가도 중국 일본 브랜드나 수입품이 정말 많다(몰 안에 있는 일본 식료품점 AEON, 편의점 세븐일레븐과 패밀리마트, 전자기기는 샤오미 화웨이, 중국 일본 음식이 정말 많은 MIX STORE나, 아예 일본 음식 수입 판매점인 DONDON, 중국 베이커리인 hogan bakery, 중국 음료 브랜드 CHAGEE나 Mixue 등등). 이 밀도가 높은 곳에 가면, 내가 말레이시아가 아니라 중국 혹은 일본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거리에 지나다니는 자동차도 혼다나 도요타 비율이 꽤 된다. 오토바이 브랜드도 혼다.. 


 
- 그래서 한 번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외국 자본 밑에서 일하는 경우 자부심이나 모티베이션이 좀 떨어지지 않을까. 열심히 일해서 남 준다는 일이 안 들수 없을 것 같았다. 물론 이 질문을 직접 현지인에게 묻는 것은 좀 실례라고 생각해 꺼내 본적은 없으나, 어쨌든 자국 기업 파워가 센 국가의 일원인 것은 꽤나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6. 다양하고 맛있는 과자들

- 진짜 사소한 건데, 나같은 과자순이한텐 정말 중요한 문제이다. 여기 대부분의 과자는 일단...맛이 없다. 맛 종류도 다양하지 않아서, 초코(압도적으로 높은 비율), 치즈, 생선(Ikan), BBQ, 새우(Udang), 오징어(Sotong), 칠리맛, 카레맛 정도로 80%의 과자가 정리된다. 가끔 있는 두리안맛 과자와 카야잼맛 과자는 별미.
초코와 치즈는 그렇다고 쳐도, 생선 과자는 아직까지 맛있는 경우를 찾아볼 수가 없었으며, 떡볶이 같이 생긴 칠리과자(뭔가 떡볶이 맛이나 칠리맛을 기대했었음)를 샀는데 후추+참기름 맛이 나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선사해 주었다(!). 새우맛은 그래도 한국 새우X과 싱크로율이 높은 편인데, 훨씬 더 짜고 소금이 과자에 깊게 밴 느낌은 아니었다. 칠리맛은 맛있는 건 맛있는데 그냥 자극적이기만 한 채 맛없는 경우도 꽤 있었다. BBQ? 제일 무난하다. 오징어도....맛없고 자극적인데 그래도 그냥 먹을 만 한 수준이다. 카레맛은 개인적으로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다. 난(Naan)에 찍어먹는 게 제일 맛있다 카레는.
과자 평가에 있어 분산치는 어느 수준인지 추정치를 알려주자면, 필자는 일주일에 과자를 평균 3봉지-4봉지 먹는다. 더 먹기도 한다. 매 주 다른 것들만 사서. 나중에 과자 모음도 올릴 예정이다.

BBQ맛
오징어맛. 아 근데 이건 좀 맛있는 편이었다.


 
-  한국은 이에 비해 콜라보도 하고, 과자 이외의 다른 음식을 모사한 케이스가 많아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맛도 훌륭한 편이다(이건 내가 한국인이어서가 아니라 진짜.....그런듯...). 피자맛을 모사한 이전 이구X성이나 벌집X자 같은 경우도 맛 싱크로율이 높지 않은가! 짱X같은 계피맛 과자를 일단 난 여기에서 본 적이 거의 없다. 쌀과자 설병/선과까지는 중국과자 버전으로 봤긴 하다. 여기에서는 다른 계열의 음식을 꽤 훌륭하게 모사한 과자가 BBQ나 나시르막맛(!) 과자 정도임을 파악한 말레이시아 뉴비들은 절망할 것이다.

말레이시아 백반 정도로 여겨지는 대표 음식, Nasi Lemak

- 그리고....한국만 질소포장의 달인이 아니다. 여기 역시 더했지 결코 덜하진 않다.

과자를 샀는데 1/3만 들어있는 새우칩
한박스라 해서 샀는데.
먹다 찍은 거 아니다.

 

7. 배타적이지만 예의바른 사람들

- 필자가 Home university에서 네팔계 인도인 친구를 사귀었을 때, 그 친구가 했던 말이 있다. '인도 사람들은 무례한 대신 친화력이 좋고, 한국인들은 예의바른 대신 배타적이다.' 
당시에는 그냥 그렇구나 정도로 넘기고 말레이시아에 입국한 후, 한 2주 정도만에 이 말을 체감했다. 쏟아지는 사생활 질문들. 초면임에도 서슴없이 다가오는 친화력을 많은 이들이 보유했으나, 한편으로는 당황스러운 소셜 애티튜드들(귀를 대놓고 후빈다던가). 기숙사에서 만난 다국적 하우스메이트들 중에서도 이 친구의 말이 적용되는 케이스가 꽤 있었다. 극I인 나와도 하루만에 친구가 될 만큼 살가우나, 위생 관념이 상당히 놀라웠던 경우들. 이런 식으로 처음엔 잘 지내다 무례하고 이기적인 행동에 질려 결국 사이가 안좋아지기도 했었다. 
선진국화가 될수록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 대한 존중이 보편화되는 건 사실인 듯하다. 미국이나 유럽권에서도 사적인 질문에 대한 민감도가 높고, 한국에서조차도 점점 공동체와 개인의 우선순위가 변하는 걸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정과 오지랖은 유사어이기에, 오지랖이 사라진 자리에 삭막함이 채워지는 과정을 우리는 겪고 있다.
그런데...그래서 어느 곳이 더 좋냐고 하면, 좀 고민스럽긴 할 것 같다. 한국에서 있을 땐, 차려야 할 너무 많은 예의들에 답답했던 날들이 많았기에. 다만 본인이 깔끔한 걸 선호하는 편이므로 한국에서의 사교 스타일이 1%정도 조금 더 맘에 든다는 결론을 내리겠다.
 

8. 자살이란 무엇인가

- 이 주제에 대해선 현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은 없었고, 전술한 네팔계 인도인 친구나 여기에서 사귄 중국인 친구들과 몇 번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모두가 '나는 그런 생각을 살면서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었는데, 진짜 신기하다.'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중국인들의 경우, 한국의 높은 자살율에 대해 모두 알고 있었다. 경쟁의식 심한 것까지 다. 진짜 잘 알아서 놀랄 정도였다. 
자살에 대한 이쪽 관점을 논할 정도로 이 나라에 대해 깊게 파악하진 못했기에, 상기 주제에 대해서는 사견을 좀 더 풀자면.. 한국에서 자살은 이 정도의 의미를 가지는 듯하다.
 
a. 고통/불행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몸부림
b. 깊은 참회의 수단
c. 억울함에 대한 마지막 소명(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될 시)
d. 상기 3요소가 다양한 형태로 혼재
 
대체로 사회의 문제인 게 안타깝다. 특히 사회적 복지나 안전망이 너무 부실한 한국의 경우, 한 번의 경제적 실패를 겪거나 범죄 피해를 당한 후의 삶이 녹록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생으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한다.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김영민 교수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시포스의 돌을 평생 굴리라는 것을 천명으로 알고 살다, 갈수록 버거워지는 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돌을 던지는 대신 자신을 던져버리는 비극. 
 
뉴스에서는 체감상 이틀에 한 번 꼴로, 혹은 그보다도 잦게 자살 건을 보도한다. 자살을 잦게 접하는데에다, 행복하지 않은 환경에 사는 우리 역시 이를 문제 해결 수단의 하나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상황이 닥칠 시, 이는 하나의 실현 가능한 고려 수단이 된다. 

한국에서 뉴스를 자주 챙겨보던 나는 여기 와서 한국 뉴스와 의도적으로 단절된 삶을 살았다. 출국 직전까지도 번아웃 등 스트레스 지수가 상당한 상태였기에, 나름 스스로 행복해지려는 시도를 한 것이었다. 이 기간 동안, 나는 자살을 '이상하지 않은 선택지'로 받아들이던 과거의 자신이 낯설어지는 경험을 하였다. 물론 한국 뉴스가 보기 싫어졌던 것이 빈번한 자살 보도 때문만이라고 보는 것은 비약이다. 그러나, 나조차도 충분히 힘들다고 느끼는 상황에서 타인의 비극적 선택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것은 불행을 가중시키는 충분한 요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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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장 3시간에 걸쳐 주절주절 썼지만, 이 역시 나의 '일리(一理)'이므로 다 맞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주제에 대해 여기에 있는 동안 꽤 많은 고민을 했었고, 고견을 가진 사람들의 인사이트를 관심 있게 찾아봤었다. 한국에 있을 때 평가했던 한국과, 여기에서 재평가한 한국은 분명 다른 느낌이었기에.
뭐, 이러나 저러나 일개 대학생 나부랭이의 인사이트이므로, 이 글을 우연찮게 발견한다면 허허 아직 멀었군 하며 웃고 지나가도 된다. 비공개로 쓰려다가 너무 길게 쓴게 아까워 그냥 공개로 돌림
 
 
 
 

막짤은 그냥 편안했던 말레이시아 페낭의 어떤 해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