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로, 눈으로 전하는 위로- 김미라 작가
1년 넘게 꾸준히 듣고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다. 저녁 6시, KBS Classic FM의 <세상의 모든 음악>이다.
20년 가까이 저녁 6시 노을과 함께 ON-AIR되는 이 프로그램의 모토는 '위로'이다. (일반적인) 직장인 퇴근 시간대라 자연스럽게 설정된 무드같다.
한창 우울증의 피크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절망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 때마다 김미라 작가가 써내는 세음의 두 코너, <마음이 머무는 곳>과 <저녁이 꾸는 꿈>은 그 절망을 조용히 토닥이고, 관조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우울증에 있어 '관조하는 힘'은 중요하다. 그 병은 시선이 오직 나의 암울한 내면만을 향하고, 그 속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는 상태가 매일같이 지속되기에.
그 절망의 순간들에서 그녀의 글들은 삶의 이유를 고민하는 나에게 일말의 희망을 보여주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소박하고도 아름다운 순간들을 담아낸 글들이 작고 지속적인 힘을 준 것이다. 1년 내내 읽고도 지금도 가끔 꺼내보는 그녀의 책 3권들은 그렇게 평생, 내가 또다시 삶의 이유를 고민하는 시기가 올 때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 같다.
그 책들을 개인적인 기록 겸 공유의 의미를 담아 남겨본다.
1.오늘의 오프닝
제일 처음으로 사서 읽었던 책이다. 세음의 오프닝 멘트도 매일매일 주옥같아서 제목을 보자마자 망설임 없이 구입하게 됐다. 세음의 팬인 그 누가 사서 읽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멋진 노을은
태양과 먼지의 합작품이라고 합니다.
먼지가 없으면 노을을 볼 수 없다는 것을 과학 시간에 배웠으면서도, 그런 설명과 무관하게
'노을은 신의 캔버스'라고 생각하곤 합니다.(65p)
언제 내 안의 성냥이 타오르는가, 언제 불꽃을 일으켜 주는 그 무엇과 만나게 되는가, 그것이 우리가 평생 알아야 할 과제는 아닐까요?(264p)
역시 좋은 질문은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고, 질문을 받았을 때 그 질문을 해결하는 능력이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287p)
2.저녁에 당신에게
세음의 이전 코너 중 하나였던 '저녁에 당신에게'의 원고를 모아 출판한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세 권중 이게 최애다. 소설과 에세이의 중간 경계에 놓인 책으로, 책을 읽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도 추천하고 다닐 정도로.
살기 싫어질 때 정말 아끼고, 반복해서, 눈에 글자를 꼭꼭 눌러담듯이 읽었다.
이 코너가 존재할 당시 세음 청취자가 아니었던 게 너무 아쉬울 정도다. 이 주옥같은 원고들을 전기현씨 목소리로 들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기억이란 희미해진 그의 글씨처럼 빛이 바래기도 하지만,
대개의 추억은 저 홀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
우리는 다만 은퇴한 배우처럼 조용히 머무르다가
가끔 추억을 재상영하는 극장에 들어와 조용히 관람할 뿐.....(86p)
사랑 때문에 평화를 포기했던 시절도 좋았지만
사랑 없이 평화롭고 지루한 요즘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언젠가는 새 일기장에 설레는 마음을 적는 날도 오겠죠.
만년필을 꾹꾹 눌러서 사랑하는 마음을 다시 새기는 날도 오겠지요.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요.(141p)
현재진행형이었던 사랑이 '옛사랑'으로 변하려는 순간이 사랑의 완성도를 좌우하는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312p)
3.그 말이 내게로 왔다
상식+감성을 동시에 키울 수 있는 책이다. 제목처럼 특정 단어의 의미를 중심으로 쓴 에세이인데, 단순히 사전적 정의뿐만 아니라 그 의미와 연관된 우리의 삶이나 환경도 확장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였던 마르쿠제는
'불행의 도취'라는 표현을 썼다.
그가 말한 '불행의 도취'란
더 많이 일하고,
그 수고와 피로를 잊기 위해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해
또 다시 더 많이 일해야 하는 악순환을 의미한다.(141p)
한 잔의 커피보다 더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있을 수도 있지만,
누구에게나 차 한 잔 마실 여유가 필요하다.
'생존'보다 '인간의 품위'를 인정하고 선물하는 것이어서 서스펜디드 커피는 더욱 의미 있다. 지진이 일어나 하루아침에 생활의 터전이 무너진 곳에서도 사람들이 정말 원했던 것은 차 한 잔 마실 공간이 마련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차 한 잔의 시간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아름다운 힘을 가지고 있다. 생과 사를 넘나들며 우주에서 지구로 귀환하는 사람들을 향한 인사 역시 '한 잔의 커피'였던 것처럼.....(212p)
이미 꺾인 꽃대에선
꽃이 피지 않는 것처럼
깨어진 맹서에선
미래를 꽃피울 수 없다고,
그러니 과거의 박제된 약속이나
기억은 유물처럼 묻어두고
일단 떠나보자고,
변화의 강물에
배를 띄워 흘러가 보자고.....(262p)
김미라 작가님의 글을 읽다 보면 그녀의 삶에 대해 궁금해진다. 도대체 어떤 감수성과 예민함을 갖고 살아야 이런 글들을 써낼 수 있는 건지, 그리고 그러한 특성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왔을지... 열정과 감수성, 예민함 등의 성격은 20대의 전유물 정도로 여겨진다. 나이가 들수록 사회에 치여 그러한 감정들은 사치이자 배부른 소리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감수성과 함께하는 삶은 참 고단한 것이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 초창기부터 작가생활을 하셨다고 들었는데(80년대), 이런 글을 장기간 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방송작가라는 직업적 사명만으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환갑이 넘은 연세에도, 꾸준히 하루 한 편 이상의 글을 써내어 위로를 전하는 작가님께 감사함과 응원을 담아 나도 글을 마무리한다.